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
부재중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
끊임없이 놓지 못할 감정들을 보관하는 것, 또 이것들이 자꾸만 커져가는 것,
이렇게 우린 각자가 만들어낸 공간 속에 갇혀있듯이,
어쩌면 우리 모두는 긴 잠에서 깨지 못하고, 끊임없는 허상 속에 헤매이는 것은 아닌지.
무엇인가 바라봄, 즉 인식에 대한 회의적 의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의문이었다.
벌써 고전이 되어버린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The Matrix'에서는 시뮬레이션 되어있는 세계 속에 들어와 혼란스러워 하던 주인공에게 과연 '진짜(Real)'란 무엇이냐며 관객들에게 현실을 구성하는 감각적 요건에 대한 철학적 담론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놓은 적이 있다.
또한, 고대 중국의 장자는 나비의 꿈(胡蝶之夢)이라는 유명한 고사를 통해 자신이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나비가 꿈을 꾼 것인지, 확실한 의식 주관의 실체와 그것에 대한 엄밀한 자각을 보증할 근거는 사실상 알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듯이 우리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어쩌면 기나긴 꿈속을 헤매이며, 삶 또한 허상 속에 그 공간을 부유(浮游)하는 여행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앞서 고루한 서두는 바로 여기 Realism이라는 타이틀의 음반이, 이 제목이 지칭하는 오래된 사상사적 논쟁처럼 저기 의식 내부 혹은 바깥에 있는 존재에 대한 '실재(實在)론'적 담론을 주제로 삼아 약 14분 남짓한 간결한 사운드 드라마로써 작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네, 누구 시선도 없는 우리 공간,,
흔적도 없이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없어진대도 굳이 멈춰 서 있어.."
어찌 보면 이것은 단순히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대'라는 이름의 타인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의식 속 비어있는 ‘자리’, 그 ‘공간’, ‘누구도 없는 우리만의 시간’
등으로 반복적으로 사운드에서 구현되는 표현들이 지각의 혼재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실재가 무엇일까. 누군가를 가시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는 것만이 그 존재를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듯이, 또 만져볼 수만 있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고스란히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만의 그 공간'은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영원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과, 눈을 감는 심연 중에 위치해 있는 공감각적 구축을 다름 아닌 사운드가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동시에, 사뭇 정제되어 있으면서 다소 사색적인 텍스트, 서정적인 멜로디 골격위에 구성된 음형의 집합들은 표면적으로 총 3개의 장면(scene)으로 분절된다. 하지만 서로의 트랙들은 조밀한 짜임새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면서, 점층적으로 극 중 화자가 만들어내는 환영적 가상세계로 인도하는 듯 하다.
일단 국악 및 월드뮤직을 기반으로 일렉트로닉 앰비언트 사운드를 주로 구사하던 프로듀서 '이 우'는 여백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유관과 전자음악의 이디엄을 능숙하게 결합하고 있는 동시에, 포크 록의 기본적 문법체계를 차용하며 독특한 음의 향연을 선사한다.
또한, 이우와 함께하는 새로운 페르소나인 보컬리스트 Lizm(심이주)는, 때론 꾸밈없이 일상적인 호흡과 신비롭고 이국적인 보이스의 매력을 상호교차하며 표현하고 있으며, 현실과 비(非)현실의 혼재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인생의‘여행길’로 은유하면서 차분한 어조와 동시에 심도 높은 사운드적 언어로 재현하고 코딩(coding)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홀로 걷는 길 외롭지 않아 우리 여정 속엔
사랑만큼은 끝나지 않기에 영원히 계속돼"